100주년에 바친 아날로그 기념비, 오토폰(Ortofon) 센츄리 TT 리뷰

음악은 나의 힘
학교 앞 레코드샵은 하루가 멀다하고 쇼윈도에 걸어 놓은 LP를 바꾸었다. 안 그래도 사고 싶은 LP들이 너무 많았는데 쇼윈도에 걸려 있는 LP들은 자신을 빨리 나의 방으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참고 넘어가기를 여러 번 하다가 결국 모아 놓은 용돈을 한 번에 다 LP 구입하는데 허비해버리곤 빈털터리로 나오기 일쑤였다. 하지만 용돈의 한계에 부딪치곤 하는 절망의 나날들. 그래서 좋아하는 곡들을 공책에 빼곡히 적은 그 종이 한 장을 쭉 찢은 후 레코드샵 주인장에게 녹음해달라고 부탁했다. 없는 곡도 많아 수정하고 추가하기를 반복, 결국 며칠 후엔 주인장은 카세트 테이프 가득 곡을 녹음해 건네 주었다. 얼마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LP 한 장 가격도 안 되는 가격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정식 발매된 테이프도 있었고 막 출시되어 있는 깔끔한 시디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LP 외엔 모두 모조품 같은 보였다. 그렇게 차곡차곡 녹음 테이프는 쌓여갔고 학년은 높아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이사를 오려 자취방을 정리하는데 라디오 방송 녹음 테이프와 그 레코드 샵에서 녹음해주었던 테이프가 눈에 밟혔다. 결국 모두 본가에 놓고 올라와버렸는데 나중에 제대하고 나서 찾아보니 누가 그랬는지 다 버리고 없어졌다. 얼마나 서운하던지. 지금도 범인은 심증은 가지만 증거가 없다. 이 얄궂은 녹음 테이프의 운명은 그렇게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후 이래저래 모은 돈은 거의 모두 CD 또는 LP를 구입하면서 사라졌지만 마음만은 충만한 음악적 감수성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LP 보다는 CD를 더 많이 구입했다. 신보들이 CD로 많이 출시되었고 음악 듣기도 편했다. 그 땐 워낙 값싼 보급형 턴테이블을 사용해서인지도 몰랐지만 CD 소리가 더 좋았다. 기껏해야 노란 오디오 테크니카나 슈어의 번개표 같은 카트리지를 사용했으니까. 슈어 V15 카트리지를 처음 구입한 것도 나중에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에서였다. 어쨌든 어린 시절 LP로 듣던 음악들은 지난한 학창생활에 힘이 되어 주었다.

 

오토폰 100주년
그 당시 오토폰(Ortofon) 같은 브랜드의 카트리지는 꿈에서나 그리던 것이었다. 번쩍 뻔쩍하는 MC10, MC20, 콘트라풍트, 론도 같은 카트리지들. 그리고 뭔가 그윽하고 품위 있는 소리를 들려줄 것 같던 SPU 시리즈는 오디오 잡지에서 보면서 군침만 흘렸다. 나중에 이런 저런 오토폰 카트리지를 사용해보면서 알았다. 그 당시 오토폰 MC 카트리지를 구입했다고 해도 그 카트리지의 황금 같은 소리를 증폭해줄 포노앰프 살 여유가 없었으니 안 사길 잘한 거다. 이런 나의 씁쓸한 자위도 이제 그만. LP를 하면서 오토폰은 곁에 자주 오갔다. 게다가 몇 년 전에 MM 카트리지로 가요를 듣고 싶어 구입했던 MM 레드, MM 블루 같은 카트리지는 격세지감의 음질을 들려주었다. 오토폰은 내 추억 속의 오토폰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나도 모르는 사이 오토폰이 100주년을 맞이했다고 한다. 1세기를 버텨왔다는 건 어마어마한 가치를 내포한다. 그들이 100년의 역사를 버텼다는 것은 다름 아닌 LP의 역사와 턴테이블의 역사를 동시에 경험해왔다는 것, 바로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의미다. 단지 적응하고 버텨왔으며 회사를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 이상이다. 음악 녹음 및 이를 담기 위한 아날로그 포맷의 마스터링의 변화에 맞추어 카트리지를 진화시켜 왔다는 의미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는 건 이 분야를 앞에서 이끌었다는 의미도 된다. 차이코프스키 1812 서곡이 LP로 발매되었을 때 이를 카트리지로 읽지 못해 음반사를 상대로 소송도 불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마치 그랜드 캐니언 협곡 같은 1812 서곡의 대포소리. 결국 오토폰 등의 카트리지 메이커들은 이런 녹음을 읽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카트리지의 성능을 진보시켜왔다.

 

오토폰 Century 턴테이블
최근 필자의 집에 오토폰에서 출시한 턴테이블이 들어왔다. 오토폰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카트리지와 턴테이블을 모두 자사 브랜드로 만들어 내놓은 것. 오토폰은 그들의 역사에 남을 법한 기념작을 출시했다.


오토폰 100주년 기념 턴테이블 센츄리 TT(Century TT)

하지만 100주년 기념작이라면 단지 기념의 의미만으론 부족하다. 기념비적이어야 한다. 턴테이블은 물론 카트리지까지 오토폰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개발해 콩코드 한정판을 출시, 센츄리(Century) 턴테이블에 적용시켰다. 바로 이것인 오토폰 센츄리의 실체다.

그렇다면 센츄리 턴테이블은 과연 세부적으로 어떤 턴테이블일까? 일단 이 턴테이블은 무척 고전적인 설계를 취하고 있다. 사각 베이스는 마치 린 LP12 등 과거 아날로그 황금기 시절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심플 디자인으로 상단에 조작 버튼은 33RPM 및 45/78RPM 전환 스위치만 존재한다.


센츄리 TT의 33, 45/78 속도 전환 스위치

센츄리 턴테이블은 기본적으로 벨트 드라이브 방식으로 내부에 서브 플래터가 있고 모터가 서브 플래터를 회전시키면 외부 플래터가 함께 회전한다. 제품을 박스에서 꺼내면 본체 및 여러 부속품들이 매우 체계적으로 빼곡히 담겨 있다. 조립은 매우 직관적이므로 그리 어렵지 않지만 고급 기답게 모두 수동이고 정확한 세팅이 필요하다. 먼저 베이스 하단에 높이 조정이 가능한 발을 장착하고 상단에 플래터를 얹으면 일단 기본적인 세팅은 끝난다. 하지만 플래터를 얹기 전에 서브 플래터 주변에 꽂혀 있는 나사 세 개를 돌려서 빼내야 정상 작동하므로 잊지 말고 제거해야 한다.


센츄리 TT에 제공되는 9인치 S 타입 톤암

다음은 톤암 부분 세팅이 필요하다. 센츄리에는 기본적으로 9인치 S 타입 톤암이 장착되어 있으며 일본제 고급 볼 베어링을 통해 작동한다. 작동은 무척 부드러운 편이며 심플한 스태틱 밸런스 타입으로 톤암 뒤편에 무게 추를 장착한 후 침압을 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단순해 보이는 이 톤암은 여러 조정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VTA, 즉 톤암의 높이를 조정할 수 있으며 아지무스(Azimuth), 즉 톤암의 좌/우 수평도 조절 가능하므로 여러 카트리지를 자유롭게 장착해 사용할 수 있다. 한편 안티스케이팅의 경우 카트리지에 주는 침압에 따라 총 3개 조정 포인트를 마련해 놓고 있는 점도 돋보인다. 다이내믹 밸런스 방식이었으면 더 좋겠지만 뛰어난 만듦새와 여러 조정 기능 등 이 가격대에서 꽤 뛰어난 성능의 톤암이다.


센츄리 TT는 다양한 조작이 가능한 톤암을 제공합니다.

 

셋업&리스닝 테스트
이번 테스트는 센츄리 턴테이블에 기본 장착되어 있는 오토폰 콩코드(Concorde) 카트리지를 사용해 진행했다. 이 카트리지는 오토폰의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부터 낯익을 것이다. 바로 1979년 당시 헤드셀과 일체형으로 디자인해 당시 덴마크 산업 디자인상을 받는 등 파란을 일으켰던 카트리지로 이후 여러 버전이 출시되면서 롱런한 모델이다. 이번에 출시된 모델은 100주년 기념으로 출시된 한정판이다. 출력은 5.5mV, 침압은 1.8g으로 침압만 조정해주면 될 정도로 센츄리 턴테이블에 최적화된 제품이다. 테스트에는 트라이코드 포노앰프를 MM으로 설정하고 이 외에 제프롤랜드 시너지 프리앰프 및 플리니우스 파워 그리고 매지코 A1 스피커를 활용했다.

“탄력적인 퍼커션과 영롱한 피아노 반주가 타이트하고 정교한 포커싱을 보인다.
보컬이 흔들림이 없고 명료하며 허밍 부분에서도 매우 선명한 소리로 노래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세팅을 끝내고 이런 저런 LP를 재생해보았다. 처음부터 이 턴테이블과 카트리지가 내주는 소리는 귀를 강하게 잡아 끈다. 정교한 음상과 전체 대역에 걸쳐 탁월한 균형감각을 갖추었다. 카리 브렘네스의 ‘A lover in Berlin’을 오랜만에 들어보았는데 탄력적인 퍼커션과 영롱한 피아노 반주가 타이트하고 정교한 포커싱을 보인다. 중역대 디테일이 무척 훌륭한데 카리 브렘네스의 보컬이 흔들림이 없고 명료하며 허밍 부분에서도 흔들림 없이 매우 선명한 소리로 노래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매우 순도 높은 사운드가 방 안을 포근하게 감싸는 느낌이다.
밝지만 얇게 흩어지지 않고 중심이 확고한 소리다.”

군더더기 없이 밝고 청명한 소리를 내준다. 예를 들어 백건우의 쇼팽 ‘녹턴’을 재생해보면 매우 순도 높은 사운드가 방 안을 포근하게 감싸는 느낌이다. 밝지만 얇게 흩어지지 않고 중심이 확고한 소리다. 한음 한음 또랑또랑하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타건이 명료하면서도 피로감을 주지 않는다. 턴테이블의 가장 중요한 플래터 회전 편차가 33RPM에서 ±0.13%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청감상으로도 매우 정교해 보인다. 피아노에서 음정이 왜곡되지 않고 무척 정확하게 표현되는 것이 그 증거다.

“훌륭한 대역 균형감은 물론 재빠른 어택과 펀치력 및 박진감 넘치는 리듬감 등을 만끽할 수 있다.
비트 넘치는 음악이나 다이내믹스 폭이 넓은 곡에서도 산만하지 않고 정돈된 표현력을 보인다.”

최근 해외에선 고음질을 위해 45RPM으로 재발매하는 음반들이 꽤 많다. 거의 러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날로그 시절 명반을 45RPM으로 재발매 중인데 중, 저가 턴테이블 중 45RPM 속도 정확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센츄리 턴테이블은 빠르게 정상 속도에 올라서며 균질한 회전속도를 보인다. 예를 들어 바네사 페르난데즈의 ‘Immigrant Song’을 필두로 여러 곡을 들어보면 훌륭한 대역 균형감은 물론 재빠른 어택과 펀치력 및 박진감 넘치는 리듬감 등을 만끽할 수 있다. 진동제어가 잘 되어 있어서인지 비트 넘치는 음악이나 다이내믹스 폭이 넓은 곡에서도 산만하지 않고 정돈된 표현력을 보인다.

“최신 디지털 음원처럼 입체적인 3D 이미징이 눈앞에 펼쳐져 현장의 싱싱한 실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 안엔 가장 최신의 기술이 녹아 있는 모습이다.”

센츄리 턴테이블의 기본적인 성능도 가격을 생각하면 훌륭하지만 콩코드 카트리지의 성능이 빛난다. 예를 들어 에이지 오우에 지휘, 미네소타 오케스트라 연주로 라흐마니노프의 ‘Symphonic dance’를 들어보면 커다란 다이내믹스도 무리 없이 소화해낸다. 특히 와우/플러터 수치가 매우 좋아서인지 무대 표현에서 무척 선명하고 올바른 정위감을 선보여 주었다. 이런 특성은 이 외의 교향곡 녹음에서도 드러났는데 마치 평면의 모노톤으로 재생하는 답답한 소리가 아니다. 마치 최신 디지털 음원처럼 입체적인 3D 이미징이 눈앞에 펼쳐져 현장의 싱싱한 실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 안엔 가장 최신의 기술이 녹아 있는 모습이다.

 

총평
스타트 버튼을 누르면 센츄리 턴테이블은 회전을 시작하고 단 몇 초 만에 정상 속도의 궤도에 오른다. 33회전을 알리는 인디게이터가 깜빡임을 멈추면 정주행을 시작했다. 45회전도 빠르게 정상속도에 진입해주니 뮤직매터스의 45RPM 한정판 LP도 즐겨 듣게 되었다. 게다가 여러 조정 기능도 편리해 향후 카트리지를 바꾼다면 이 또한 걱정이 없을 것 같다. 부속품의 경우 무척 세세하게 챙겨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플래터에 얹는 가죽매트의 품질이 번들 치고는 훌륭하다. LP 위에 얹어주면 좋은 클램프 같은 경우도 센츄리 설계 특성상 조임식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과 일치하는 클램프가 기본 제공되어 편의성 및 음질 면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오토폰은 카트리지를 제조해오면서 아날로그 LP의 역사를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견뎌온 메이커다. 100주년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그만큼 무거운 책임과 함께 오토폰 사용자들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이 서려 있다. 비슷한 가격대 여타 턴테이블과 비교해 훨씬 더 고급스러운 디자인과 정교한 설계 등 결정판을 만들어낸 인상이다. 센츄리 턴테이블을 성능을 볼 때 기본 제공되는 콩코드 센츄리 카트리지는 100주년 기념 선물에 가깝다. 만일 이 가격대 아날로그 턴테이블이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센츄리 턴테이블을 구입하라고 권하고 싶다. 센츄리는 오토폰 100주년 역사에 바친 기념비적 턴테이블이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