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한 메머드급 앰프, Progression

 
 
미국 3대 앰프 디자이너를 꼽으라면 Ayre의 찰스 한센, 마스터 오디오 시스템즈의 단 다고스티노, 제프 롤랜드를 꼽아왔다. 하지만 다른 이는 이 중 넬슨 패스를 꼽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제프 롤랜드는 새로운 개념의 파워앰프 설계로 돌아서면서 최근엔 찰스 한센, 단 다고스티노, 넬슨 패스를 꼽기도 한다.
 
사실 이들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일이기도 하다.
 
단 다고스티노는 크렐의 창업자이자 수석 디자이너였다. 그는 개인적 이유로 크렐을 떠난 뒤 몇 년 후 마스터 오디오 시스템즈를 창업했다. 하지만 회사 이름 앞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단 다고스티노 마스터 오디오 시스템즈가 회사명이 되었으나 회사의 이름 보다 더 유명한 그의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되었다.
 
난 한 가지 문화적인 충격이 빠진 일화를 잠시 얘기하려 한다. 내가 처음 뮌헨 하이엔드 오디오 쇼를 방문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 하이엔드 오디오 메이커의 제작자들은 그 쇼를 방문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세계 최대의 하이엔드 오디오 쇼로 거듭나면서 단 다고스티노 역시 뮌헨 하이엔드 오디오 쇼에 맞춰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의 독일 디스트리뷰터와 함께 말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Super Duper Busy(문법상 맞지 않지만 우리 나라말로 표현하면 열라 바뻐)였다. 쉴 틈도 없이 비즈니스 미팅과 인터뷰가 이어졌던 것, 나도 그와 함께 인터뷰를 나눌 수 있었지만 고작 30~40분 남짓, 그것도 한국 수입원 대표와의 각별한 인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그의 배려였다. 인터뷰 내내 수 많은 사람들의 카메라 셔터가 몇 분 단위로 이뤄졌다. 특별한 포즈를 취해 달라는 부탁 없이.. 하이엔드 앰프 제작자 중 수퍼 스타 같았다.
 
나는 순간 머릿속에 유럽에서도 통하는 제작자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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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의 데뷔작은 모멘텀이라는 시리즈였다. 모노블럭 파워앰프가 먼저 등장했으며 그 다음 프리앰프와 스테레오 파워앰프가 등장했다. 모멘텀 모노블럭은 세계적으로 대단한 히트작으로 통한다. 그가 새로운 회사를 창업할 당시 그의 자택의 일부를 사무실로 사용했는데 현재는 애리조나에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의 공장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오래도록 회사 운영을 함께했던 이를 사장으로 스카우트했으며 라인업을 확충할 수 있는 인원들도 보충했다. 그리고 올해 그는 나에게 말 한 마디를 건넸다. ‘드디어 내가 앰프 설계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제작된 첫 파워앰프가 프로그레션이다. 앞서 언급한 내용에 의미들을 담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프로그레션의 첫 모델은 모노블럭 파워앰프로 제품의 아이덴티티는 모멘텀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브레게 시계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전면 와테이지 미터와 더불어 대형 홀을 가진 히트싱크 그리고 최대한 나사가 보이지 않는 디자인, 미려한 금속 가공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모멘텀에 비해 더욱 화려해진 부분도 있다. 더욱 커진 몸체, 그에 맞게 대형화 된 히트싱크, 2배 이상 커진 전원 트랜스포머와 출력 증가 등을 꼽을 수 있다. 디자인과 스펙으로 보면 프로그레션은 모멘텀의 상급 모델로 보일 정도이다.
 
물론 모멘텀 쪽이 더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가격도 모멘텀쪽이 2배에 가깝다.
 
그렇다면 하극상처럼 보이는 프로그레션은 어떻게 이런 완성도를 가질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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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섀시다. 모멘텀의 경우 솔리드 알루미늄 가공에 의해 완성된 모노코크 섀시이다. 원형 알루미늄 덩어리의 무게를 70kg 내/외로 추측하고 있는데 회로와 부품을 장착하기 위한 공간을 드릴로 모두 깎아낸 것이다. 굉장히 비효율적인 작업처럼 느껴지지만 높은 댐핑력과 설계상 더욱 높은 전자파 차폐 능력을 가질 수 있고 이음새를 접합하기 위해 나사를 필요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유일한 단점은 가공에 많은 시간이 걸리고 아노다이징이 무척 어렵다는 것과 마감에 작은 티라도 생기면 그대로 폐기할 수 밖에 없다는 부분, 재료 값이나 가공 비용도 엄청난 고가이지만 앞서 언급한 작은 문제로 인해 폐기해야 된다면 원가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불어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이 미국 내 금속 가공을 가장 잘하는 벌텍 툴에서 생산되는 것도 모멘텀에 엄청난 가격표를 붙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만든다.
 
하지만 프로그레션은 섀시 가공은 애리조나에 위치한 가공 업체에 의해 이뤄진다. 그리고 솔리드 알루미늄 디자인을 포기한 대신 전면 패널, 바닥, 히트싱크, 후면, 상판 모두 개별적으로 가공된 알루미늄 패널에 의해 조립된다. 하지만 단 다고스티노는 프로그레션 역시 모멘텀에 준하는 품질을 구현하기 나사를 최대한 노출 시키지 않는 방식을 채택한다.
 
또한 모멘텀의 경우 히트싱크에 구리를 가공하여 사용하고 있어 엄청난 원가 상승을 일으키지만 프로그레션은 가공된 알루미늄을 히트싱크로 채용하고 있다. 구리는 알루미늄 대비 열 흡수 능력과 열 방출 능력이 2배에 이른다. 비교적 작은 크기에 대출력 파워앰프를 만들 때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이조차 고가이기 때문에 이렇게 덩어리로 사용된 경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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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레션은 22kg의 알루미늄 덩어리를 여러 개의 대형 홀을 나열시켜 가공해 히트싱크로 사용한다. 대형 히트싱크이며 공진에도 대응하는 디자인이며 거대한 질량으로 열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원형 알루미늄 블록의 무게는 무려 22kg이다. 이를 토대로 모멘텀과 버금가는 방열 효과를 이뤄내고 있다.
 
원가 절감을 이루면서도 모멘텀 수준의 외형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을 엿볼 수 있으며 완성도는 무척 좋다.
 
하지만 모멘텀에 비해 변경된 디자인적 구조 때문에 오히려 나아진 것도 있다. 바로 내부 공간이다. 모멘텀은 솔리드 알루미늄 형태로 가공할 수 있는 거의 최대 크기로 사용되고 있다 해도 무방하다. 솔리드 알루미늄이란 2배가 커진다고 해서 단순히 비용이 2배만 커지는 것이 아니다. 4배 이상 내지는 크기에 따라 그 이상의 비율로 비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단 다고스티노는 모멘텀을 디자인할 때 확보할 수 있는 공간 내에서 트랜스포머를 위해 2/3 공간을 내어줬다. 그리하여 최대 300와트에서 400와트의 출력을 끌어낼 수 있었다. 사용된 트랜스포머는 일반적인 형태에 비해 비교적 납짝한 형태의 토로이달 트랜스포머이며 용량은 1,800VA(M400 기준)이다.
 
프로그레션은 4,000VA 용량의 트랜스포머를 사용한다. 그만큼 내부 공간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1,800VA 용량도 상당한 수준이지만 4,000VA이면 얼티밋 급이다. 프로그레션이 초기 발표 되었을 때 8옴에서 출력은 800와트였으며 2옴에서 3,200와트의 출력이 가능하다고 기재했을 정도니 4,000VA 트랜스포머도 거의 쥐어짠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출력을 얻을 수 있는 용량이었다.
 
하지만 출력은 실제 발매에 앞서 500와트로 수정되었다. 2옴에선 2,000와트의 출력을 낸다. 이는 진짜 하극상이 일어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출력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내부 부품 구성은 그대로 둔 채 출력만 제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단 다고스티노 웹사이트를 보면 디스토션에 대한 측정치는 8옴에 800와트에서 이뤄진 자료를 제시하고 있으며 1kHz에서 0.15%만 찌그러진다. 보통 최대 출력의 스펙을 표기할 땐 디스토션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선 바로 코앞에서 정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스펙대로라면 프로그레션은 8옴에 800와트를 출력할 수 있는 파워앰프가 맞다. 전면에 와테이지 미터를 꺾어버리고도 남을만한 출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프로그레션을 잘 만들어놓고도 단지 숫자상으로 모멘텀에 크게 앞서기 때문에 디튠 아닌 숫자상의 디튠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스펙을 읽을 줄 아는 이는 누구나 8옴에서 800와트의 최대 출력을 낼 수 있는 파워앰프라 판단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 생각해도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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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파워앰프의 드라이빙 능력이 트랜스포머 용량이나 출력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트랜스포머 역시 전원부를 구성하는 단 하나의 파트일 뿐이고 훌륭한 전원부라 표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분이 잘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수 십 년간 파워앰프를 디자인해온 단 다고스티노가 갖고 있는 노하우를 생각해보면 이에 대한 걱정은 불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음질의 결정적인 키는 프로그레션 역시 모멘텀의 출력부 회로를 기반으로 제작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프로그레션은 디스크리트 구성에 풀 밸런스, 다이렉트 커플드에 의해 회로가 설계 되었다. 커플링 콘덴서에 의한 착색을 배제하면서 좀 더 광범위한 주파수 범위를 구현해 내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참고로 프로그레션의 청음은 내 시청실에서 이뤄졌다. 아는 이들도 있을 텐데 나는 Ayre의 레퍼런스 모델인 KX-R Twenty와 MX-R Twenty를 사용하고 있다. 이 둘의 직접적인 비교도 가능했는데 무척 흥미로운 일이 되었다. 둘의 성격이 무척 달랐는데 뜻 밖에도 나는 이 둘의 차이를 마크 패드모어와 마티아스 괴르네의 겨울 나그네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두 레이블 모두 하모니아 문디로 큰 틀에선 뒷배경이 정숙하고 S/N이 무척 뛰어난 녹음 질을 갖추고 있지만 음의 입자감은 무척 달랐다. 그만큼 프로듀서의 역량에 따라 음반의 성격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는 단순히 바리토너와 테너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프로그레션은 첨예한 음을 선사한다. 해상력에 있어선 A 그룹 클래스에 속해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단 다고스티노가 모멘텀 이전에 설계했던 파워앰프들의 특성은 중저음의 양감을 중시해 상대적으로 고역의 개방감이 부족한 느낌을 들게 했다면 프로그레션인 여기에서 완전히 해방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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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더더기로 느껴졌던 저음의 살집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골격을 중시하는 저음으로 바뀌었다. 확실히 요즘 오디오파일이 중시하는 트렌드를 정확히 읽어냈다고 사료된다. 그만큼 저음의 양감보단 깊이를 중시하며 빠른 저음의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4,000VA 트랜스포머 용량과 더 나아가 400,000마이크로 패럿의 대용량 콘덴서로 무장한 것이 재생음으로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실제 프로그레션은 상당한 크기의 제품이지만 전원부만 대략 75% 정도의 내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프로그레션을 내 시청실에서 보름 이상 들으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단 다고스티노가 자신의 새로운 재생음의 패러다임을 완성한 듯한 느낌이었다. 음의 순도를 개량하여 아날로그에 가까운 첨예한 맛을 선사하는 것, 여기서 고역의 디테일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순간적으로 아주 힘찬 응답을 요구하는 투티나 포르테에 폭발적인 힘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단 다고스티노가 모멘텀 이전에 설계한 메머드급 파워앰프에서 무척이나 안타까웠던 여러 교향곡에서의 레가토가 무척이나 성숙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열은 무척 적다. 리뷰가 진행 되었던 11월 말에 10시간 이상이나 동작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히트싱크에 손을 대면 열이 느껴지긴 커녕 다소 차가운 기운마저 느껴졌다. 이것은 대출력을 구현하기 위해 채널당 48개의 출력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것과 무관하진 않다.
 
내가 기억하기론 단 다고스티노의 이전 파워앰프들에 열광했던 이들이 많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싫어했던 주된 이유가 너무나 근육질적인 저음, 그리하여 잃게 되는 고역의 디테일, 그리고 높은 발열이었다. 이제 확실히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들이 싫어할만한 이유가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고 그들 역시 프로그레션이 주목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처 : HIF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