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ave Filter 3-P – 만신창이가 된 음악신호에 생기를

오디오 액세서리를 AB테스트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신기하다. 전원장치, 노이즈 필터, 음향판, 인슐레이터, 케이블 리프터 등 지금까지 테스트한 액세서리들은 대부분 확연한 음질차이를 보여줬다. 플라시보 효과라기엔 그 효과가 너무나 컸다. 어쩌면 오디오 기기라는 것이 그만큼 전원과 노이즈와 진동과 룸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정도로 예민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또한 오로지 귀로만 위험소지를 구별해야 했던 원시 포유류의 DNA가 지금도 우리 몸에서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근 독일 진공관 앰프 메이커인 옥타브(Octave)의 커먼모드 노이즈 필터 ‘Filter 3-P’(이하 3-P)를 집중 시청했다. 따로 전원을 공급받거나 안에 증폭소자가 없다는 점에서 패시브 타입 필터이며, EMI 같은 커먼모드 노이즈를 차단하기 위해 트랜스포머를 이용한 전형적인 ‘커먼모드 트랜스포머’ 타입 필터이다. 디지털 파트가 아니라 컨버팅 직후의 아날로그 신호 전송과정에서 노이즈를 차단하는 점도 특징이다.
 
거두절미하고 AB테스트 결과는 놀라웠다. ‘3-P’ 투입후 필자의 귀에 와닿는 음의 촉감은 마치 해안가 뜨듯한 바닷물에서 시원한 깊은 바닷물로 바뀐 듯했고,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처럼 촉촉했다. 음악신호 파형은 그대로 전해주되 노이즈만 핀셋으로 집어낸 것처럼 깨끗하고 활달한 음으로 변했다. 무대가 좌우앞뒤로 넓어진 것, 음들이 소프트해진 것, 색감이 진하고 말쑥해진 것도 특징. 한마디로 만신창이가 된 음악신호에 생기를 불어넣은 화타와도 같은 신통한 액세서리였다. 
 
EMI, 커먼모드노이즈, 커먼모드 트랜스포머
 
‘3-P’를 본격 탐구하기에 앞서 용어와 개념부터 짚고 넘어가자. 이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 없이 ‘3-P’를 접하면 제작사 논리에 그대로 휘둘리거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 취급으로 끝날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에나 맹신이나 미신은 금물인 것이다. 지금 오디오 환경은 그야말로 고주파 노이즈 투성이라고 보면 된다. 필자 집만 해도 공유기, TV, 노트북, 컴퓨터, LED, 그리고 네트워크 플레이어와 최근 구매한 크롬캐스트 오디오가 온갖 EMI(Electro Magnetic Interference)를 일으키고 있다. 한마디로 이들 기기 때문에 본인들 스스로는 물론 멀쩡히 잘 있던 DAC나 앰프, 스피커까지 ‘전자기장 간섭’이라는 치명상을 입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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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EMI의 주범은 이 기기들에 내장 또는 어댑터 형태로 전원을 공급하는 SMPS(Switching Mode Power Supply. 스위칭모드 전원장치) 때문이다. 주로 MOSFET을 고속 스위칭시켜 AC 전원을 DC 전원으로 바꿔주는 SMPS 구조상 고주파 노이즈는 태생적으로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SMPS의 통상 스위칭 주파수는 50kHz~1MHz인데, EMI가 일어나는 주파수가 150kHz~30MHz라는 게 결정적 이유다. 심지어 EMI는 10kHz 주파수 대역에서도 일어난다. 어찌됐건 SMPS가 EMI를 일으키는 주파수 대역을 포함한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참고로 라디오주파수간섭이라는 부르는 RFI(Radio Frequency Interference)는 SMPS 주파수보다 훨씬 높은 30MHz~1GHz에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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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EMI는 커먼모드 노이즈(Common-Mode Noise) 형태로 오디오 디지털/아날로그 인터케이블을 타고 들어온다. 즉, 접지선(Ground)을 기준으로 신호선(+)과 리턴선(-)에 위상과 전압이 모두 똑같은(common) 형태로 끼어드는 것이다. 결국 인터케이블로 연결된 오디오에서 EMI를 막는다는 것은 커먼모드 노이즈를 차폐시킨다는 뜻이고, 이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장치로 알려진 것이 바로 커먼모드 트랜스포머다. 

트랜스포머는 잘 알려진 대로 1차 권선과 2차 권선이 물리적으로 절연됐지만 두 권선 사이에서 발생한 전자기장으로 교류 신호나 디퍼런셜모드 노이즈(Differential-Mode Noise)를 ‘트랜스’하는 장치. 때문에 EMI가 커먼모드 형태로 1차 권선에 들어오면, 그 들어온 위상과 전압이 똑같기 때문에 이 노이즈를 ‘트랜스’할 전자기장이 발생하지 않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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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자료에 따르면 잘 만들어진 ‘커먼모드 트랜스포머’의 EMI 감쇄율은 -60dB(10kHz)에 이른다. 즉, 1차 권선에 들어온 커먼모드 노이즈의 신호세기가 1000이라면, 2차 권선에 나타나는 노이즈는 1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옥타브의 ‘3-P’는 이 감쇄율이 -80dB(10kHz 기준)에 이른다. 데시벨로 표기하니까 실감이 안나지만 이를 환산하면 10000대1, 즉 0.0001% 감쇄율이라는 놀라운 수치를 보인다. 이것이 필자가 AB테스트를 하면서 체험한 음질변화의 가장 큰 배경일 것이다. 

Filter 3-P 외관과 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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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제품을 살펴본다. ‘3-P’는 그리 크지 않다. 정면에서 봤을 때 폭이 70mm, 높이가 75mm에 불과하고 안길이도 186mm에 그친다. 하지만 무게는 3.6kg이나 나간다. 실제로 덩치만 보고 한 손으로 들려했다가 그 꿈쩍도 안하는 무게에 깜짝 놀랐다. 물론 내장된 트랜스포머와 튼튼한 금속 하우징, 그리고 제진(진동방지)을 위해 투입된 레진 때문일 것이다. 밑면에 보면 접지 분리(Ground lift) 스위치가 있는데, 이는 입력단과 출력단의 접지를 분리시킬 것인지(On), 연결할 것인지(Off) 선택하라는 얘기다. 기본은 접지 루프를 방지하기 위해 ‘On’으로 설정돼 있다. 

올해 5월 독일 뮌헨오디오쇼에서 첫선을 보인 ‘Filter 3-P’는 기본적으로 아날로그 신호단에 투입해 케이블을 타고 들어온 EMI 노이즈를 최대한 제거하는 패시브 필터다. 때문에 입력단자도, 출력단자도 모두 밸런스(XLR)가 됐건, 언밸런스(RCA)가 됐던 아날로그 단자로만 구성돼 있다. 시청시에는 XLR 입출력 버전을 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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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 노이즈를 제거하는 필터인 만큼 ‘3-P’는 앞단에 네트워크플레이어나 DAC, 공유기, NAS가 포함된 디지털 환경이 구축돼 있을 경우에 더 효과적이다. 즉, DAC과 프리앰프/인티앰프, 또는 DAC 내장 네트워크 플레이어와 프리앰프/인티앰프 사이에 ‘3-P’를 투입하는 게 최선이다. 네트워크 플레이어나 DAC를 통과하는 음악신호에 이미 EMI 노이즈가 유무선 네트워크와 디지털 케이블, 전원케이블을 통해 스며든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존 고주파 필터와 다른 점은 노이즈를 포함한 모든 신호를, 예컨대 가청영역대를 훨씬 지난 50kHz 이상에서 싹둑 잘라 로우패스(low-pass) 필터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3-P’는 ‘커먼모드 트랜스포머’ 방식을 활용, 음악신호인 아날로그 교류 신호는 그대로 통과시키면서 커먼모드 형태로 끼어든 EMI 노이즈만 걸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노이즈 감쇄율(CMRR)이 10kHz에서 무려 -80 dB에 이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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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스펙도 대단하다. 주파수응답특성은 10Hz~150kHz(-1dB), 고조파왜곡(THD+N)은 0.001% 이하(1kHz)를 보이는데, 이는 ‘3-P’가 그만큼 원 음악신호를 오리지널 상태 그대로, 어떠한 상처 하나 입히지 않고 뒷단에 넘겨준다는 얘기다. 임피던스 매칭도 무난한 편. 예컨대 앞단이 DAC일 경우 출력 임피던스가 600옴(XLR), 300옴(RCA) 이하이기만 하면 되고, 뒷단이 프리앰프일 경우 입력 임피던스가 10k옴 이상이기만 하면 된다. 요즘 웬만한 DAC과 프리앰프치고 이 수준을 못지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옥타브와 트랜스포머
  
그러면 진공관 앰프 메이커인 옥타브는 어떻게 ’3-P’ 같은 하이엔드 EMI필터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이는 옥타브의 연원을 따져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옥타브의 전신이 트랜스 전문 제작사였기 때문이다. 옥타브는 안드레아스 호프만(Andreas Hofmann)이 1986년 독일 남부의 블랙 포레스트에 설립했는데, 무엇보다 트랜스포머와 전원보호회로를 직접 설계하고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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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안드레아스 호프만의 부친이 이미 1968년부터 ‘호프만 트랜스포머’라는 트랜스 제작사를 운영해왔고, 안드레아스 호프만은 젊은 시절부터 이 회사에서 일을 해오다 옥타브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옥타브는 전원트랜스와 입출력 트랜스를 직접 설계하고 감는다. 전원트랜스의 경우 앰프 전 회로에 안정적인 전기를 공급한다는 점에서 핵심 부품이지만, 일부 내부 전선의 경우 음악신호도 같이 흐르기 때문에 사운드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앰프의 음색과 스피드, 주파수 응답특성을 좌지우지하는 출력트랜스 역시 진공관 플레이트에 B전압을 가하고, 푸쉬풀 앰프의 경우 서로 다른 위상의 증폭신호를 합쳐주기 때문에 역시 진공관 앰프의 명줄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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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에 관한 이러한 깊은 이해와 제작 노하우가 있는 옥타브이기 때문에 ‘커먼모드 트랜스포머’ 제작에 뛰어든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3-P’에 투입된 트랜스가 어떤 구조인지, 코어와 코일은 어떤 재질을 썼는지, 그리고 ‘커먼모드 트랜스’에 투입되는 Y커패시터는 어떤 제품인지 공개되지 않았지만, 노이즈 감쇄율을 -80dB 수준까지 높이는데 이 트랜스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역시 이상과 이론을 완성시키는 것은 장인급 제작 기술인 것이다. 

시청 
 
시청은 호화롭게 진행했다. ‘3-P’ 앞단에는 웨이버사 ‘W Router’와 ‘W Core’, 코드의 CDP 겸 업샘플러 ‘Blu MK2’, DAC ‘DAVE’를 투입해 밸런스 케이블로 연결했다. 뒷단 역시 밸런스 케이블로 연결시켜 코드 프리앰프 ‘CPA5000’과 모노블럭 파워앰프 ‘SPM1400MK2’를 투입했다. 스피커는 매지코의 ‘S5’. ‘DAVE’를 코드 프리앰프와 직결했을 때와 ‘3-P’를 거쳐 연결했을 때를 비교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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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AB테스트를 하는 내내 ‘이 필터 맛을 한 번 본 이상에는 없이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만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오리지널 음들을 갉아먹던 노이즈가 최대 1만분의 1로 줄어들기 때문에 주로 선명함이나 색채감쪽에서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 효과는 거의 전반에 걸쳐 일어났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음에 활기와 생기가 돈다는 것. 음의 촉감이 촉촉하고 소프트해진 것에도 감탄했다. 사운드스테이지까지 넓고 깊어진 것은 EMI로 인해 위축됐던 스테레오 음악신호가 마침내 기지개를 마음껏 핀 덕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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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3-P’ 투입으로 인한 부작용이나 단점은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 투입시에는 음량이 작아진 것 아닌가 싶어 프리앰프 볼륨을 약간 높였지만, 이마저도 시청이 진행될수록 생략했다. 평소 익숙했던 노이즈의 증발을 음압레벨의 감소로 귀가 착각했던 것 같다. 그 대신, 딥블랙 위에 펼쳐진 원색 음들의 활기찬 무도회를 만끽했다. 나오는 음들이 저마다 생기발랄해 듣기 좋았다. 일청을 권한다.
 
출처 : HIFI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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