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메이드, 하이엔드 앰프의 분수령 CH 프리시전 L10, M10 리뷰 – Part I

예술과 완벽주의
팝 아트의 거장 짐 다인(Jim Dine)이나 에드 루셰(Ed Ruscha), 노벨문학상 수상자 귄터 그라스(Gunter Grass). 이 외에도 고든 파크스(Gordon Parks), 기 부르댕(Guy Bourdin), 로버트 고어(Robert Gore)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게르하르트 슈타이들(Gerhard Steidl)과 일한다는 사실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만큼 사진을 잘 찍을 자신이 없어 인쇄, 출판을 선택했다는 그는 1972년 10대때 이미 자신의 이름을 내건 출판사를 열고 수십 년 동안 책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는 책을 아트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게르하르트 슈타이들(Gerhard Steidl)

구겐하임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이 인쇄물을 제작할 때면 오직 그를 찾으며 때로 샤넬 같은 럭셔리 브랜드와 일하기도 한다. 잠수함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의 출판사 건물 슈타이들빌레는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고행의 장소가 된다. 모두 인 하우스 방식으로 제작되며 대부분 예술가들인 의뢰인들은 바로 곁에서 먹고 자며 긴밀하게 소통해 기필코 최고의 아트 북으로 결실을 본다.


이것은 완벽주의 산물이다. 기획부터 편집, 인쇄까지 모든 것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집중력과 장인정신으로 일관한다. 5년 만에 한 번씩 수억 원을 들여 인쇄기기를 교체하며 때론 지나친 열정 덕분에 애초에 예정했던 책 제작비용을 넘어서기 일쑤다. 때론 책 하나 만드는데 수 억원을 투자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대량 생산되는 책과 같을 수 없다. 책에 쓰인 잉크의 종류와 색감, 종이의 무게와 질감, 손으로 넘길 때 손가락에 전해지는 촉감까지도 모두 고려 대상이다. 이러한 완벽주의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의 가치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스위스 로잔으로부터…
음악을 재생하는 하이엔드 오디오에서도 가끔 이런 완벽주의로 예술의 경지에 오른 기기들이 있다. 특히 최근 십여 년간 쉬지 않고 달려온 스위스의 한 브랜드가 눈에 띈다. 제네바 호수 기슭에 위치한 CH 프리시전(CH Precision)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스위스 출신의 엔지니어들에 의해 설계되고 자국 안에서 제작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밀 공학 부분에서 독일과 함께 세계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 스위스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제작한다고 해서 모두 뛰어난 음질까지 들려준다는 보장은 없다. 하드웨어의 완성도와 음악적 표현력은 또 다른 영역이니까. 스위스 최고의 명문 중 하나인 로잔대에서 수학한 플로리어 코시(Florian Cossy)를 중심으로 골드문트(Goldmund)와 일했고 애너그램 테크놀로지(Anagram Technologies)를 만들었으며 오르페우스(Orpheus)로 그 이름을 알린 브랜드. CH 프리시전의 전설의 서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0주년 그리고 10 시리즈
탄탄하게 쌓아 올린 디지털, 증폭기술 및 서킷 설계 기술은 CH 프리시전을 완벽에 가깝게 만들었다. 그리고 스위스 하이엔드 오디오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단, 10년 만에 이룩한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지난 세월 CH 프리시전이 만들어낸 작품들은 화려했다. C1과 D1 그리고 L1 및 M1, A1 그리고 이 후 후속 모델들. 모듈식 설계로 여러 옵션을 통해 업그레이드가 가능했고 X1 전원부는 신의 한수였다. 더불어 이런 모듈식 설계는 모든 기기들을 하나 더 구입해 모노럴 구성으로 확장할 수 있게 해주었다.


CH 프리시전 1시리즈 제품군

이윽고 개발되어 나온 10주년은 다시 한번 패러다임을 쉬프트 시켰다. 적어도 이후 전원부 X1을 통해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없는 완전체로 태어난 것. 우선 최초로 공개한 L10 프리앰프와 M10 파워앰프는 기본 구성이 본체와 전원부 등 두 개씩의 몸체를 갖는다. 뿐만 아니다. 전반적으로 기존 클래식 라인업에서 플래그십으로 올라오면서 여러 부분에서 세밀한 개선 작업이 이루어졌다. 기존 제품의 품질도 물론 최고지만 여기서 더 상승시켰다는 의미다.


CH 프리시전 10 시리즈 L10, M10

일단 PCB 레이아웃을 개선하고 보다 더 우수한 부품을 사용했다. 새로운 회로를 구상해 실행에 옮겼으며 그것은 결국 전 모델 전원부 분리형으로 결론 지어졌다. X1처럼 여러 기기들에 적용할 수 있는 유니버설 타입이 아니라 해당 모델에 최적화한 전용 전원부다. 따라서 다른 기기와 호환이 되지 않으며 오직 해당 기기만을 위해 기능한다. 마지막으로 색상을 다양화해 기본 색상인 블루 그레이 외에 그라파이트 그레이 그리고 샴페인 골드 색상을 지원하고 있다.

 

사라짐으로써 존재하는 프리앰프 L10
소스 기기로부터 신호를 받아 증폭하는 프리앰프에 대한 CH 프리시전의 설계 원칙은 여전하다. 전용 프리앰프를 시스템으로부터 분리하고 난 후에야 그 정체를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이다. 가능한 최대로 고요해야 하며 자연스러운 트랜스페어런시(Transparency)를 유지해야 하고 절대적으로 안정적이어야 한다. 음악의 역동적 다이내믹스를 그대로 보존하고 음악 감상자와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신호의 순도를 왜곡하지 말아야한다. 신호가 프리앰프를 통과하면서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아야한다.


CH Precision L10 프리앰프

이러한 고성능 프리앰프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모범생 같은 프리를 지향했던 마크레빈슨(Mark Levinson), 적막한 배경의 제프 롤랜드(Jeff Rowland), 모든 신호를 그대로 통과시켜버리는 패스랩스(Pass Labs) 등이 머리를 스쳐간다. 하지만 그 뿐이다. 우리 시대에 뛰어난 프리앰프가 흔치 않은 이유는 그만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험상으로도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프리앰프를 구하는 게 최고 수준의 하이엔드 파워앰프를 구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음악성이 좋으면 해상력이 아쉽고, 무대를 펼쳐내는 능력이 좋으면 음색에 마음이 돌아서곤 했다.


L10은 프리앰프부와 전용 전원부로 구성됩니다.

CH 프리시전이 만든 L10은 L1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다시 한 번 드라마틱하게 업그레이드된 퍼포먼스를 위해 만들어졌다. R-2R 래더 방식 볼륨을 제작해 탑재했으며 신호경로는 최소의 길이를 갖는다. 정교한 정류와 필터링을 수행하는 다단계 전원장치는 물론이다. 광대역에 매우 높은 슬루-레이트 및 DC 커플링 설계 등 전 방위에 걸쳐 신호의 이동과 전원 공급에 있어 빈틈이 없어 보인다.


L10 후면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을 듯하지만 L10은 L1의 모든 부분들을 재검토해서 만들어졌다. 모든 소자들을 재평가해 더 뛰어난 것들로 업그레이드했고 L10에 최적화시켰으며 캐패시터 등의 용량도 업그레이드했다. 모든 소자들은 풀 밸런스, 풀 디스크리트 방식으로 적재적소에 배열되었으며 당연히 노이즈와 디스토션은 더욱 더 낮아졌다. 아마도 가장 커다란 업그레이드는 전원부 분리일 것이며 L10을 위해 전용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컨트롤 부분과 아날로그 부문에 각각 별도의 전원을 인가하는 전원부다.
L1에서 과연 그 물리적, 전기적 특성이 얼마나 더 좋아졌는지는 가늠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과연 청감상 어느 정도 퍼포먼스 향상을 가져올 수 있을까? L10은 투명하며 음악의 모든 세밀한 입자와 다이내믹스를 그대로 파워앰프에 전달해주었다. 순간 그 존재 자체를 느낄 수 없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네 개의 파워앰프를 한 몸에
파워앰프 M10도 L10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전용 전원부를 애초에 별도로 설계해 두 개의 섀시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전원부를 증폭부와 모두 하나의 몸체에 넣었다면 두 사람이 붙어서 움직이기도 힘들 듯하다. 우선 본체 후면부를 보면 좌/우 완벽히 모노 구조로 설계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에 A1이 100W, M1/M1.1이 200W M10은 공히 채널당 300W 대출력 앰프로 올라섰다. 이에 따라 전원부를 별도로 설계하고 전원부에서 총 네 개로 구성된 케이블로 전원을 공급받는다. 심지어 정위상과 역위상 신호까지 별도로 받아 작동하게 설계하는 초강수다.


CH Precision M10 모노블럭 파워앰프

후면에는 채널당 두 조의 출력단이 마련되어 있고 RCA와 BNC 입력에 더해 XLR 입/출력단이 마련되어 있다. 이는 애초에 설계 시부터 두 대로 구성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보인다. 스테레오 파워앰프로도 쓸 수 있으며 모노로 구성해 사용할 수도 있다. 또한 모노브리지는 물론 바이앰핑이 가능한 설계다. 전원부를 보면 20A 전용 인렛이 두 조 마련되어 있어 각 부문별 AC 전원도 따로 공급하는 설계다. 거의 파워앰프에서 구성할 수 있는 모든 기능과 최고의 성능을 위해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구조다. M1.1보다 더 극단적인 증폭의 세계로 진입한 모습이 적나라하다.


M10은 채널당 2섀시 구조(파워앰프부, 전원부)를 갖습니다.

아직 CH 프리시전에서 자세한 내용은 공지하고 있지 않지만 기존 M1.1을 고려할 때 기본 토폴로지는 유사할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이그젝트 바이어스, 즉 가변 바이어스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클래스 AB 증폭을 하지만 낮은 출력에선 클래스 A 작동을 할 것이다. 하지만 M10은 M1.1의 두 배 가량의 규모로 설계된 제품이다. M1이 총 두 개의 앰프를 내부에 넣어 놓은 앰프라면 M10은 총 네 개의 앰프를 내부에 장착하고 있다. 이 덕분에 엄청나게 커진 전원부를 별도의 섀시로 독립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M10 파워앰프부 후면

이 외에도 글로벌 피드백과 로컬 피드백은 이번 M10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최종 출력 신호와 입력 신호를 비교해 출력 신호를 다시 되돌려 보내 보정하는 피드백 기술. 하지만 글로벌 피드백을 너무 많이 걸면 고조파 왜곡율은 적어지지만 대신 청감상 음질이 하락한다. 대개 건조하고 딱딱해지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글로벌 피드백을 낮추면 더 투명하고 선도 높은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저역이 약간 물러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 피드백을 다루는 방식이 제조사마다 다른데 CH 프리시전은 아예 피드백 레벨을 사용자가 조정할 수 있도록 설계해 놓았다. 더군다나 M10에선 이전보다 그 조정폭을 1% 단위로 세밀하게 조정할 수 있다.


M10 전원부 후면

 

스위스 정밀공학의 분수령
L10과 M10 모두 겉으로 보기엔 기존 클래식 시리즈와 유사한 만듦새를 보인다. 하지만 작동 방식은 공유하되 내부 설계는 거의 두 배 정도 상향 조정된 모습을 보인다. 프리, 파워 각각 전원부를 포함해 두 개 섀시로 만들어져 아날로그와 디지털,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신호 등을 별도로 입력 받아 작동하는 방식은 성능 면에서도 드라마틱한 변화를 가져왔다. L10과 M10은 그 설계 면에서 내가 만나 본 그 어떤 앰프보다 혁신적이고 스마트하며 무서울 정도로 극단적이다. 이것이 바로 설립 10주년만에 이룬 분수령의 화려한 민낯이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

CH Precision L10, M10 리뷰는 Part II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