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CD] 풍성하고 우아하게 묘사한 빈의 정수, 카라얀의 ‘장미의 기사’

새로운 미디어를 적극 수용했던 카라얀
헤드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은 음반 녹음에 대해 평생 열정을 갖고 임했던 선구자이며, 남겨진 녹음도 SP 시대부터 디지털 녹음까지 방대한 양을 자랑합니다. 항상 최첨단 기술 혁신에 민감했던 카라얀은, 녹음 기술이 진행될 때마다 새로운 녹음방식으로 자신의 레퍼토리를 다시 녹음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디지털 녹음기술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필립스(Philips)와 소니(Sony)가 개발한 컴팩트 디스크(CD, Compact Disc)는 1981년 4월 잘츠부르크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새로운 미디어의 프로모션을 자청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그것은 CD라는 디지털 미디어가 대중화되는데 순풍으로 작용하였습니다.


헤드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

 

카라얀 말년의 디지털 녹음
카라얀이 처음 디지털 녹음을 한 것은 1979년 12월부터 1980년 4월의 바그너(Wagner)의 ‘파르지팔(Parsifal)을 시작으로 1980년 1월~4월 모차르트(W. A. Mozart) ‘마술피리(Die Zauberflöte KV 620)’ 그리고 이후 거의 모든 녹음은 디지털로 진행하였으며, 1989년 사망할 때까지 10년간 베토벤, 브람스, 드보르작,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등 기본 레퍼토리 역시 다시 녹음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연주나 녹음에 없었던 새로운 작품을 녹음하는 등 카라얀 말년에 이뤄진 예술의 깊이를 기록하는데 적극 참여하여 수많은 음반을 출시하였습니다.


오페라 전곡 음반도 9팀이 제작되어, ‘마술 피리’와 ‘투란도트’의 2조를 제외하고 잘츠부르크 음악제와 부활절 음악제에서 실제 오페라 공연과 병행하여 녹음하였습니다. ‘장미의 기사’도 이 방식으로 수록된 1983년 7월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새로운 연출 상연을 위해 1982년 11월부터 녹음을 시작하여 1984년 1월 완성하였으며, 그해 여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맞춰 발매되었습니다.

 


카라얀의 ‘장미의 기사’, ‘장미의 기사’의 카라얀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는 카라얀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오페라였습니다. 카라얀의 첫 번째 포스트인 울름 가극장(Ulmer Theaters) 시절 다룬 낯익은 오페라 중 한 곡이며(1932년 3월), 전후인 1952년 2월에는 밀라노 스칼라극장(Scala Theaters)에서도 공연하였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카라얀과 ‘장미의 기사’를 강하게 결속한 것은 1956년 12월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EMI에서 녹음한 전곡반과 1960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상연 및 그 무대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마르샬린(Marshallin)으로 불린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Elisabeth Schwarzkopf) 외에도 당시 명가수를 출연시켜 제작한 EMI의 LP와 영화는 작품의 매력을 세계적으로 보급시키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그 결과 ‘장미의 기사’하면 카라얀이라는 이미지를 확산시켰습니다.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Elisabeth Schwarzkopf, 1915~2006)

 

오케스트라가 오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치밀한 지휘
1983년 잘츠부르크에서 상연은 카라얀에게 거의 20년만에 오페라를 지휘하는 기회였으며, 그 사이 카라얀의 원숙함이 같은 시기에 녹음된 도이치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 반에도 반영되었습니다. 느린 템포 속에서 모든 음표나 모티브, 노래 그리고 슈트라우스가 단순한 멜로디 아래 삽입한 복잡한 반주도 세부적으로 묘사하여 지휘자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오페라의 이야기나 등장인물의 감정과 움직임을 뚜렷이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오페라를 일상적으로 상연하는 빈 국립 가극장의 오케스트라이기도 한 빈 필의 정감 있는 사운드로 카라얀의 지휘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작품의 향수와 황혼의 분위기를 남김없이 재현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

 

가수의 개성을 살린 적재적소 캐스팅
가수진은 카라얀이 당시 오페라와 성악곡 상연에서 즐겨 협연했으며 서로 음악적으로 통했던 미성과 표현력을 겸비한 당시 유명 가수를 기용하고 있습니다. 안나 토모와 신토우(Anna Tomowa Sintow)는 새로운 마르샬린의 모습을 창조했고 쿠르트 몰(Kurt Moll)은 폭넓은 보컬레인지를 요구하는 옥스역을 화려하게 연기해냈습니다. 아그네스 바르다(Agnes Varda)는 자신 있는 카르멘을 연상시키는 혈기 왕성한 옥타비안을 들려줘 이른바 이상적인 이미지의 옥타비안을 완성하였습니다.

퍼니널 역의 고트프리트 호닉(Gottfried Hornik), 소피 역의 자넷 페리(Janet Perry), 바르차키 역의 하인츠 제드니크(Heinz Zednik) 등을 각 배역의 캐릭터에 맞도록 적재적소에 배치하였습니다.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 루치아노 파파로티(Luciano Pavarotti), 호세 카레라스(Jose Carreras) 등 녹음에서는 카메오로 유명가수를 기용하던 경향이 있던 테너 역에, 본래의 역할이 어울리는 빈슨 콜(Vinson Cole)을 캐스팅한 것도 카라얀만의 혜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리안네 역에는 콜로라투라(Coloratura) 소프라노 빌마 리프(Wilma Lipp), 후작가의 집사역에는 쿠르트 에크빌루츠(Kurt Equiluz)를 기용하는 등 세부적인 배려의 캐스팅이 진행되었다는 점도 이 녹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나 토모와 신토우(Anna Tomowa Sintow, 1941~)

 

최고의 음질로 제작된 하이브리드 SACD
녹음은 빈의 무지크페라인(Wiener Musikverein)에서 약 1년 2개월동안 4회의 연속적인 세션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무지크페라인은 울림이 많아 녹음에 적합하지는 않은 환경이었지만, 1970년대 초 이래 빈 필을 중심으로 이 홀에서 녹음을 거듭해온 도이치 그라모폰의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어, 대사가 생명인 스트라우스의 오페라임을 감안하여 가수의 미성에 초점을 맞추고 딕션을 명료하게하여 가수를 감싸듯이 주위에 퍼지는 오케스트라의 풍부한 울림을 폭넓은 다이내믹레인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보에와 클라리넷, 호른을 비롯한 빈 필의 특징적인 목관·금관의 솔로도 전체적인 균형을 해치지 않고 재현되어 현악기 군의 섬세한 솔로에서 두터운 투티까지 남김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2막 옥타비안이 도착할 때까지의 무대 뒤 합창(2번 디스크 3번 트랙), 3막 요리집의 별실 밴드 연주 등 스트라우스가 무대 뒤에서 연주로 지정한 원근감을 살리면서, 데카의 소닉 스테이지처럼 무대 위 등장인물의 움직임을 일일이 소리로 표현하기보다는 스트라우스가 쓴 음악의 울림 매력을 고스란히 스테레오 음장 안에서 재현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디지털 녹음의 초기이고, LP 발매가 CD에 선행되던 마지막 시기의 녹음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리마스터링은 이번 음반에서 최초로 시도하였습니다. 이번에 발매한 하이브리드 SACD는 마스터테이프 선정부터 최종 DSD 마스터링 과정에 이르기까지 타협 없는 작업을 거쳤습니다. 특히 DSD 마스터링에 있어서 D/A 컨버터와 루비듐 클럭 제너레이터를 통해 튜닝된 에소테릭의 최고급 기기들을 투입했으며, 멕셀(Mexcel) 케이블을 사용하여 마스터가 갖고 있는 정보를 남김 없이 디스크화 하였습니다.

 

헤드베르트 폰 카라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오스트리아의 지휘자로, 그는 35년간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재직했습니다. 1950년대 중반부터 타계할 때까지 서양 고전 음악의 주요 지휘자였으며, 엄청난 양의 음반을 제작하였습니다. 카라얀의 음반 판매량은 생전에만 1억 1,150만장 정도로 추정되며, 사후에 판매된 양을 포함해 2억장이 넘습니다. 또한 아직 발매되지 않은 녹음들이 존재하여 판매량의 기록은 계속 갱신될 것으로 보입니다. 1929년 울름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그해 막스 라인하르트가 주최한 음악회을 지휘했습니다. 그 뒤 나치 시절 나치에 가입하여 프랑스 정복, 오스트리아 합병 등 여러 행진곡을 지휘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월터 레그에 의해 복직하여, 1955년부터 1989년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의 종신 지휘자를 지냈습니다. 1967년부터 1989년까지 잘츠부르크 음악제 음악 감독을 지내다가 1980년대 베를린 필하모닉과 사이가 좋지 않아지자 빈 필하모닉과 협연하였습니다. 1989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며 잘츠부르크에 묻혔습니다.